임시 동아리

동이(東夷)를 찾아서(계속 엎그레이드)

작성자 금강승 작성일 2014.11.06. 12:04:43 조회수 8,534
동이(東夷)를 찾아서(계속 엎그레이드)
1. 이(夷)의 어원을 찾아서


옴바아라훔 (2012-10-08 11:53:00, Hit : 2822, Vote : 35)


夷(이) 字의 새로운 발견


사실 한자 夷 자는 매우흥미로운 글자입니다.

매우 중요한 글자나 단어는 현대까지 그 의미가 상실되지 않고 존재하여 온다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아리따운 님에서 아리따라는 어간은 아마도 아사달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을 것 같고, 또 아스라하다, 아리송하다,라는 어휘와도 통할 것 같습니다.

추가부분...夷(이) 자와 尸(시) 자의 옛글자(금문, 갑골문)가 동일하였다는 데서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한 것입니다.

저는 夷 자의 고대 발음이 분명 Xi(Xu) 였다고 보고 나는 그 이를 사랑해 라는 말처럼 존중의 3인칭을 기본으로 하면서, 어머니(심마니)의 니 자와 아버지의 지 자로의 변형을 생각해 봅니다. 훈족(Xun)이 가르쳐준 역사의 비밀이라는 글에서 지나인들이 그들을 獯 또는 狁으로 불렀다는 말에서 민족의 이름은 Xun, 나라나 왕의 이름은 Xan(일한국, 징기스칸 등), 그리고 한 개인의 3인칭은 Xi(Xu)로 불렀을 것이라는 가설인 셈입니다.

어머니나 심마니에서 보듯 니에서 2인칭을 뜻하는 너가 나왔을 가능성이 많은데 현대에 와서 너 라는 말 보다 니 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것을 보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3인칭에서 2인칭으로의 전환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인데, 임자라는 말이 2인칭으로 쓰이고, 당신도 2인칭으로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저 라는 단어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서로 통하는데, 사투리에서 지가 했어요, 지놈이 뭐라고 등의 용례에서 우리말의 1인칭과 3인칭의 대명사로 발전을 한 경로를 추적해 볼 수도 있습니다.(고대어에서 그가 말하기를 이라는 표현을 저가 말하기를 이라고 쓰지요.)

그렇다면 夷자의 원형인 Xi(Xu)로부터 우리말의 1인칭, 2인칭, 3인칭이 모두 유래되었다는 가설을 세워 볼 만하고 분명 고대 우리말에 그러한 어휘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증좌가 매우 풍부한 것입니다.

존중(그 이)과 비하(지깢놈의 지)를 뜻하는 단어인 원형으로서의 夷 자 하나에 우리 겨레의 미래가 달려 있는 듯합니다.

우리 모두 누구인가에게는 사랑하는 그 이(夷)가 아닐까요?

모두 좋은날 되소서 옴바아라훔

추의: 추가한 부분은 글 중에 추가 부분이라고 명기하였습니다.


위 글에 대한 댓글

카오스 (2012-10-08 14:52:13)

음...夷(이)자의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어서 흥미롭군요.

그런데, 이 '夷(이)'를 흔히들 '오랑캐(=짐승같이 미개한 사람)'를 지칭하는 글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래 이 '夷(이)'자는 '오랑캐란 의미의 한자어'가 아니라 "사람을 지칭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이'에 대한 '한자표기'인 것"으로 봅니다.

물론 이 순수한 우리말 '이'는 현대한국어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 어린아이를 말하는 : 어린-이 ==== 어린사람
- 못난 사람을 지칭하는 : 못난-이 === 못난사람
- 멋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 멋장-이 === 멋있는사람
-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을 말하는 : oo장-이 [대장장이 등] === 대장간 일을 잘하는사람
- 그(저,이) 사람을 말하는 : 그(저,이)-이 === 그(저,이)사람 [옴바아라훔님이 찾아주신것]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옴바아라훔님께서 추측하신 아버지의 '지', 어머니의 '니', 심마니의 '니' 등도 위에서 말한 '이'의 변형으로 보입니다만, 그 어원이 '흉노어인 Xi(Xu)'로부터 였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다만, 자연스럽게 흉노어가 우리말의 근원이었을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순수 우리말인 '이'의 의미가 '사람(人)'이었음은 분명하다고 보이며, 그 증거가 앞에서 말한 '천자가 주관하는 땅(地=九黎/구리)'을 9등분한 하나를 '黎(나라,리)'라고 하였었고, 그 '黎(나라,리)의 백성'을 '夷(사람,이)'라고 대응시켰었음은 분명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지칭하는 순수 우리말 '이'가 먼저 생성되었었고, 그 '사람,이'를 한자로 문자화시킨 것이 '夷(사람,이)'라는 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夷(사람,이)'자의 字型(자형)이 어떤 상형글자에서부터 연유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夷'라는 한자는 사람을 지칭하는 순수 우리말 '이'를 표현하는 문자로 정착된 것이어서 이 '夷'는 원래 '오랑캐,이'가 아니라 '사람,이'가 원래의 字意(문자의 의미)였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이를 '오랑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역사왜곡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그 왜곡의 진행과정을 카오스의 앞의 글에서 설명드린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사람을 지칭하는 아름다운 순수 우리말인 '이'에 대한 한자가 '夷'였었다는 것은 우리를 '東夷(동이)' 혹은 '東夷族(동이족)'으로 호칭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부끄러움을 주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역사왜곡을 타파하려면, 우선 '夷'를 오랑캐로 보는 인식부터 하루빨리 고쳐야만 할 것입니다.....


2. 동(東)의 어원을 찾아서

출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919


주 : 위의 출처로 들어가서 사진 등을 봐야 이해가 선명할 듯합니다.

해 뜨는 나무 동(東)자는 짐 보따리 그림이었다-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 ceo@citinature.com

우리나라 이름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예로부터 조선(朝鮮) 청구(靑丘) 고려(高麗) 등과 함께 동국(東國) 또는 해동(海東)이라는 이름도 썼다.


동(東)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며 공자(孔子)가 '살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하여 좀 기꺼운 이름자이기도 하고, 중국인들이 동쪽이나 바다 건너 동쪽(해동) 뜻으로 우리를 부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큰 활[대궁(大弓)]이라고 읽지만, 그네들은 '오랑캐'로 읽었다는 이름 동이(東夷)에도 들어있다.

신라 문호 최치원(崔致遠)의 글에 일찍 나오고, 고려 동전[주화(鑄貨)] 이름(동국통보)이나 조선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보듯 동국은 우리나라를 이르는 이름으로 오래 쓰였다.

사방 중 첫째인 동쪽, 해 뜨는 곳인데다 옛 사람들 생각의 중요한 기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치로 봄[춘(春)]의 의미이니 이 글자는 참 상서로운 이미지를 지녔다. 그래서 더 이 글자를 좋아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짐 보따리 그림이 동(東)의 초기 글자가 된 것을 설명하는 그림. 이락의(李樂毅) 저, 박기봉(朴琪鳳) 역 한자정해(비봉출판사 刊)에서 인용.

말밑 즉 어원(語源)에 대한 궁리로 이 말을 장엄하게 꾸미고자 하는 시도도 많았다. 즉 東의 어원은 '나무에 걸린 해'이고 그 방향인 '동쪽'으로 의미가 확대됐다는 설명을 말한다. 선생님도 언론인도 모두 그렇게들 풀어내니 나중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어원과 구조(構造)를 혼동한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의 東은 허리에 차는 전대(纏帶)나 짐 자루의 양쪽 끝을 묶은 그림이다. 처음엔 '물건'의 뜻으로 만들어졌을 터. 그러다 소리가 비슷한 다른 말의 기호(글자)로 이용되면서 '동쪽' 뜻의 글자가 된 것으로 추측한다. 갈말(학술용어)로는 이를 가차(假借)라 한다.

이 글자의 해를 가리키는 일(日)자가 초기문자 갑골문에서는 해 그림이 아니라는 것, 오랜 시간 속에서 자루 그림이 기호로 바뀐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동서(東西)란 낱말을 지금도 중국에서 '물건'이란 뜻으로 쓰는 이유를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한다.

소리 비슷한 움직일 동(動)자와도 뜻을 나누는 사이다. 문자학자 김태완 교수(전남대 중문과)의 귀띔이다. 말하자면 '하늘로 솟구치는(움직이는) 해'라는 뉘앙스를 東자가 품고 있다는 풀이다. 소리와 관련해 뜻을 풀어내는 성훈(聲訓)이라는 문자학의 과거 방식도 이 이름 東의 깊이를 이렇게 더한다.

'나무에 걸린 해'라는 풀이는 나무 목(木)과 해 일(日)자가 겹쳐진 짜임을 설명한 것이다. 끝 묶은 자루 그림의 도안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모양으로 바뀐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새김에만 의존한 그 풀이는 다른 풀이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설문해자는 나중 글자인 소전체(小篆體)의 모양만 보고 그 뜻을 풀었던 것이다.

갑골문의 발견(1899년)은 한자의 본질을 뒤집다시피 했다. 문자학자 허신(許愼)이 서기 100년에 내놓은 '설문해자'는 학문적 충실함으로 지금도 존경받으며 인용되지만, 책을 쓰던 그 시기에는 기원전 1000년경의 상(商)나라 문명 유적인 갑골문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다. 갑골문은 그때까지의 어원과 구조의 혼동 등 문자의 오류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이 대목, 어원과 구조의 구분은 문자의 형음의(形音意) 즉 모양 소리 뜻을 추출해내는 중요한 실마리다. 어찌 그림이 기호가 되고, 뜻이 바뀌고, 그런 소리로 읽는지를 알려주는 장치인 것이다. 이런 지식이 쌓여 말글의 순도(純度)가 높아진다. 어원은 말의 시발점이고, 구조는 현재의 위치다.

어원에 세월의 더께 쌓인 것이 구조인 것이다. 東의 어원이 '나무에 걸린 해'라고 하는 것은 행주치마의 어원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倭賊)과 싸우던 부녀자들이 돌을 나르던 앞치마라고 하는 것과 같은 민간어원(民間語源) 또는 속설이다. 나라사랑 뜻도 있어 얘깃거리로 환영받기는 하나, 사실과 다른 이런 방식은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가 된다. 지식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다만 상식 차원일지라도, 본디(갑골문)를 알지 못한 채 문자의 말밑을 논하는 것은 모래성처럼 위태롭다. 남 앞에 서는 이들의 '아는 체'는 세상에 해롭다. 모르는 것 보다 더. 청웅인 http://www.coo21.rgro.net/ 에서 인용

위 청웅님의 글에 대한 의견

東자는 갑골문이 발견 되기 전 금석문에도 보이는 것으로 해뜨는 나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동사로는 동여 매다 에 쓰이는 동이다(묶다)에서 왔음이 분명합니다.
http://www.internationalscientific.org/CharacterEtymology.aspx?characterInput=%E6%9D%B1

명사, 혹은 대명사의 東은 다분이 쌀 한 동이...물 한 동이...의 뜻이 있고요., 동아리...라는 뜻, 그리고 앳동이, 귀염둥이에서 보듯 사람이나 얼굴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금문이나 갑골문을 자세히 보면 분명 얼굴의 모습이 보이고요...금문에서의 한자는 어떤 특정 사람을 나타낸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tong 이란 말의 출발은 tang이 아닌가 합니다. 동그랗다. 탱탱하다. 둥그스럼하다. 탱글탱글하다... 퉁그스 동그라미 씹탱구리 영감탱이...수도 없죠.

모두 동그란 하늘, 둥근 태양이라는 뜻이 내표 되어 있죠. 바로 탱그리이며,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이죠.

단군이란 어원도 탱그리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4&sn=on&ss=on&sc=on&keyword=옴바아라훔&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8952

東에 관한 더 좋은 토론이 활성화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모두 좋은 날 되소서. 옴바아라훔





3. 동이(東夷)의 어원을 찾아서

솔본 (2006-01-31 05:29:17, Hit : 5003, Vote : 171)



[펌] 최초 확인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신동아-


학술/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최초 확인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邾)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 새로써야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고대사산책 (2006-01-31 09:41:24)

- 산동성의 노(魯)나라는 전통적으로 동이족이었고 산동성 곡부 출신인 공자도 당연히 동이족이 맞습니다. (산동성 곡부와 강소성에서 김해 예안리처럼 편두가 발견된 바도 있고..)

- 무열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했다는 것은 김춘추의 출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공격목표 즉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이(嵎夷)의 '嵎'는 그 의미가 1) 산굽이[山曲], 2) 해뜨는 곳[日出處/暘谷], 3) 산동성 등주의 지명 등이예요. 산굽이는 일반적인 의미겠지만, 일출처라는 것은 동쪽을 뜻하여 동이를 가리킬 수 있고, 중원에서 볼 때 역시 산동성을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겠지요. 산동성 등주의 지명을 바로 가리킬 때도 있고....



고대사산책 (2006-01-31 09:57:14)

산동성의 래이(萊夷)가 마한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삼국유사 남대방조 주와 [삼국지] 한전을 비교해보면 지금의 하북성 동부에 있었던 낙랑군이 원래 마한이었다 하고, 난하의 동북 적봉일대가 대륙에서 가장 이른 문명발상지이며, 고인돌의 분포지역,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역 등을 보면 고조선은 그 권역이 환발해권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지리적인 중심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산동성 동북의 萊지방이지요(환발해권/산동, 하북, 요녕, 평안, 황해).



홍승희 (2006-02-01 22:27:36)

근세조선 정조 연간에 필사된 동국지리지에 보면 고구려, 옥저, 예맥 등을 통칭 조선이라 하고 그 구역은 각기 다르니 조선의 본 강역을 한서 여러나라전을 상호 참고한 즉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마한, 동으로는 예맥과 접하고 서쪽 물가는 대해임을 알 수 있다고 기록했네요. 그에 앞서 소개한 전한서 조선전에는 진번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구요.
그런데 짧은 한자 실력이라 충분한 번역은 못하고 있지만 전한서 조선전에서 진번조선의 위치를 묘사한 부분에 진나라 멸망후 연에 속하던 요동 외곽에 한 쪽으로 수복된 요동 옛 요새에서 패수까지가 연과의 경계라는데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진번조선에 속하게 된 진나라 故空地로 도주했다는데 이 패수의 위치가 참 묘하죠? 그렇다면 요동 서쪽에 패수가 있어야 마땅한거죠?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가 요동에 위치하며 천리 남쪽에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고 있는 땅 사방 2천리라고 묘사되네요.
후한서 백제전에는 백제에서 면포를 생산한다고 전하는데 고려말에 비로소 문익점에 의해 목화가 전해졌다는 말과의 상관관계는 또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 저자는 분명이 단군이 요와 나란히 건국했음을 밝히고 있어서 아직도 단군을 신화라 우기는 이들이나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깍아내리고자 하는 이들이 제대로 봤으면 싶네요.
이런 자료를 강단 사학에서는 뭐라 평하는지 궁금하네요.



홍승희 (2006-02-01 22:51:16)

후한서 삼한전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고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며 54개국이 있으며 북으로는 낙랑과 접하고 남으로는 왜와 접하며 진한은 동쪽에 위치하며 12국이 있고 북으로 예맥과 접하고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며 12국이 있고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 무릇 78개국이 있으며 백제 역시 그 가운데 한 나라다....땅은 도합 4천여리에 걸쳐있고 동서는 바다 있으며 옛 辰國이 그 뿌리다...
'반도 3천리'라는 노래 가사가 무색하네요.
마한에서 면포를 만들고 배(梨)같은 큰 밤이 나오고 꼬리 긴 닭이 있어 그 길이가 5척이나 된다네요. 배는 돌배 정도로 이해한다 해도 재미있는 기록들이지요. 필사본이라 글씨 읽기가 만만치는 않아 대충 그 정도만 전합니다.

http://www.coo21.rgro.net/ 에서 인용

동이(東夷)를 찾아서(계속 엎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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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쑤 2015.11.10 06: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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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립대학의 숨어있는 진지한 강의를 이제야 봅니다.
출석을 워낙 드문드문 하다 보니~
날살돌이 2015.03.08 09: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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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내용의글입니다.
덩치 2015.02.23 16: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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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네요.
날살돌이 2015.02.05 09: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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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요 열공해야죠
bi42ro 2015.01.28 0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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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어렵슴니다@!@
강촌 2014.11.10 08: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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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공부 많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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